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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짜 생각

혈액형

by 구경거리 2012. 1. 17.
초등학교때 혈액형 검사를 했던 기억이 난다. 했다는 사실만 기억할 뿐 내 혈액형이 무엇이었는지는 가물가물 하다. A형이었던 것 같았는데 아무튼 그렇다. 내 자신의 혈액형이라 하면 기억을 해 둘 법도 한데, 기억이 나지 않는 것 보면 별 관심이 없었나 보다. 하기야 생일도 잘 모르는 놈이 혈액형은 무슨.
94년 초일 것이다. 중학교때 부터 발병된 심장 부정맥의 원인을 정확히 진단하고 그에 맞는 조치를 하기 위해 병원에서 거의 3개월을 보낸 적이 있다. 그 때 내 병상앞에는 이름과 나이, 성별 그리고 혈액형을 의미하는 듯한 알파벳이 적혀 있던 것이 기억난다. 그 때 그 알파벳이 A 였던 것 같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랬던 것 같다. 그것이 혈액형을 의미하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그냥 혈액형일 것 같았고 그래서 그냥 혈액형이라고 생각해버렸다. 그 이전에도 누군가 혈액형을 물으며 A형이라고 대충 대답 했었으니까. 혈액형을 모른다는 소리로 괜히 별난 놈 취급받기 싫어서. 꼭 혈액형을 병원에가서 확인하지 않더라도 나는 A형일 수 밖에 없었다. 사람의 성격과 혈액형을 연결짓는 '피의 과학'이 이상하리만치 발달한 우리나라에서 A형에 대한 분석결과는 바로 나를 설명하는 것이나 다름 없을 만큼 맞아 떨어졌다.  더욱이 우리 집에는 A형이 압도적으로 많다. 사실 자신의 혈액형에도 무관심한 놈이 부모님이나 다른 형제들의 혈액형이 궁금 했을리가 없다. 다만 조카들 중 몇몇이 우리 집안 사람들의 특징을 이야기 하면서 A형과 연결지어 이야기한 것이 기억에 남기에 A형이 많다는 것을 짐작으로 알고 있는 정도다. 그러고 보니 어머님이 O형, 아버님이 A형이라고 들은 것도 같다. 그렇게 보면 우리집에서는 A형과 O형만이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렇게 봐도 저렇게 봐도 난 A형일 수 밖에 없고 A형의 삶은 거부 할 수도 의심할 수도 없는 나의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간혹 소심한 A형이 싫기도 했으나 그래도 B형보다는 좋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는 B형들 참 재수없다. 특히 남자 B형. 고집 불통에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하려 드는 것 하며 자신의 의도대로 되지 않았을 때에는 어떻게 해서든 싫은 티를 내야 직성이 풀리는 그 이해할 수 없는 B형이 아닌게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여자도 예외는 아니다. 지나치게 강하게 느껴지는 B형 성격, 여자로서는 정말 꽝이다. 여자든 남자든 B형만 아니면 됐고 나는 A형이니까 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말이다. 주변 사람들도 누구나 나를 보면 A형이라 생각한다. 그만큼 A형 스럽게 보인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일게다. 간혹 너가 무슨 A형이야 라며 나를 A형남자로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면 나 A형 맞아, 라고 항변해 보지만 마음 한켠으로는 무언가 찜찜한 찌거기 같은 것이 남는다. 그 때 기분이란, 실력은 충분히 되는데 공인된 자격증 하나가 없어서 스스로 위축되는 기분이고, 중요한 공식 문서 상에 당연히 찍혀 있어야 할 직인 하나 빠져 있는 듯한 기분이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A형 남자로서 공식적인 자격을 획득하리라.

오늘 또 부정맥이 찾아왔다. 겨울만 되면 연중행사 처럼 서너번은 응급실을 찾게 된다. 가서 하는 거라곤 가슴에 동그란 스티커 몇개 붙이고 거기에 심박동수를 체크하는 의료기기로 이어지는 선을 연결한다. 그리고 심전도검사라는 것을 하고 박동수를 확인한다. 그런후에 아데노신이라는 주사를 맞는다. 주사액이 혈관을 타고 심장에 이를 때 즈음 가슴에는 뻐근하면서도 꿈틀거리는 듯한 느낌이 퍼지고 이내 박동수는 정상을 되찮는다. 그와 동시에 상반신 전체를 점령했던 통증도 사라진다. 거짓말 처럼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리고 세상 그 어느 때 보다도 편안하고 안락함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혈액형을 확실히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A형이겠지만 애매한 A형이 아닌 확실히 공인된 A형으로 살고 싶었나보다. 공신력있는 기관(병원)으로 부터 A형으로서의 공식적인 자격을 부여받고 싶은 그런거.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일정시간 이상은 안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료진의 한결같은 처방에 따라, 그 시간 동안은 항상 천정을 보며 멍때리고 있어야만 했다. 그 시간이 얼마가 되느냐는 순전히 그날의 당직 의사에 달려있다. 어떤 의사는 30분이면 만족하고 어떤 의사는 1시간 이상이어야 했다. 그렇게 응급실 당직 의사들을 만족 시기키 위해 멍 때리고 있어야 할 거라면 이참에 제대로 확인 한번 하자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혈액검사해야 한다니까 혈액형 검사도 추가해 달라고 했다. 내 팔뚝에서 피같은 피가 뽑혀 어디론가 끌려간지 한 시간 정도. 검사 결과가 나왔다. 공식적으로 A형임을 인정받는 순간이 오고야 만 것이다. 의사가 나에게 검사 결과를 들고 온다. 그리고 지금까지 베일에 가려져 왔던 어마어마한 비밀이라도 알려줄 것 같은 엄숙한 자세와 경건한 목소리로

"B형 입니다."

제기랄. 이건 또 뭐야. 내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니겠지? 저 의사가 날 놀리는 건 아니겠지? 혹시 혈액이 바뀐건가? 왜 산부인과에서는 아기도 바뀌는데 조그마한 주사기에 담긴 혈액이라고 바뀌지 말란 법은 없잖아. 그것도 아니면 이 나이에 출생의 비밀이라도 알게 되는거야! 출생의 비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작은 흥분 같은 것이 스물스물 기어오르는 듯 했다. 대단한 비밀의 끝자락을 우연하게 잡은 것이다. 이제 그 아슬아슬한 실마리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조심조심 끊어질 듯 한 그 실마리를 잘 엮어 조금도 훼손되지 않은 진실의 몸통을 캐내야 한다, 는 숙명과 마주한 느낌이 그 정체였던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런것이 있을리 없잖아. 무슨 삼류소설도 아니고. 출생의 비밀은 그렇다치고, 그런데 왜 하필이면 B형이야. O형도 있고, AB형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B 형이냐고 젠장.

"예에~? B형이요?"
"왜요 B형이면 안되요?"

"혈액 바뀐거 아닌가요?"
"아닌데요"

"혈액형이 살면서 바뀔 수도 있나요?"
"그런 경우는 없는데요"

"우리 부모님의 혈액형이 A형과 O형 인걸로 알고 있는데, 그리고 저도 이날 까지 A형으로 알고 우리 형제들중에도 B 형은 없는데 어떻게 B형일 수가 있죠?"
"... 그런 경우... 부모님께서 혈액형을 잘못 알고 계신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아니면 널 주워왔거나...)"

옆에서 청소하는 남자, 아니 청소부는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의료진도 아닌 것 같은, 접수계에서 계산하는 스탭인듯한 남자가 웃으면서 거든다.
"주워서 키운건가. 허허 친자확인도 이참에 해봐요. 허허"

바로 어머님께 전화를 했다. 

"어머니 혈액형이 뭐예요?"
"뭐?" (우리 어머님은 팔순이 넘으셨다. 건강은 좋으시나 귀가 잘 안들리신다.)
"혈액형이요. 어머니 혈액형이 뭐예요?"
"허리통? 허리통이 뭐야?"
"아니, 혈액형. 혈.액.형. 피. A형이니 O형이니 하는거. 피. 피."
"어~ 허랙켱. A형, O형 하는거. 그거... 나는 몰라"

헉. 혈액형 모르신다니.

"그럼 아버지 혈액형은 뭐야?"
"어~ 아버지? ... 그것도 몰라. 우리는 몰라. 병원에 가봤어야 알지. 우리는 그런거 몰라."

할 말이 없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 당신의 혈액형도 모르시는데 아버지 혈액형을 알고 계실리가 없다. 괜한 질문했다 싶다. 바로 전화 끊고 큰형수에게 전화를 했다. 큰형수가 그나마 우리집 식구들에 대한 이러저러한 사실들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화를 안 받으시네. 큰 형님께 전화를 했다. 혈액형이 뭐냐 물으니 A형이라고 하신다. 나 B형 나왔다고 하니까 웃으시더니 너 주워왔나 보다라고 하신다. 셋째 누나에게 전화를 했다. 혈액형이 뭐냐고 물었다. B형이란다.  이 말 한마디로, 어쩌면 집안을 송두리째 혼란에 빠지게 할, 이날 이때까지 위태로운 비밀로서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밝혀져서는 안 될 그 무시무시한 출생의 비밀 같은 것은 순식간에 꼬리를 감추고 말았다. 어떻게 된거냐고 묻자 누나도 결혼전까지는 O형인줄 알았단다. 결혼후에 병원에 갔더니 B 형이란다. 나 주워와서 키운 것 아니란다. 아니면 셋째 누나와 나 둘만 주워왔던가. 그러니까 일련의 상황들을 여기서 한번 정리해보면 나도 얼마든지 B형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즉 부모님께서 혈액형을 잘못 알고 계셨다는, 아니 우리가 잘못 예단하고 있었다는 결론 되시겠다.
아무튼, 혈액형을 아직까지 모르고 살아온 나, 결혼 후에야 자신의 진짜 혈액형을 알게된 셋째누나, 혈액형 몰라도 얼마든지 장수 할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고 계시는 우리 부모님. 그 부모님의 그 딸이고 그 아들이다. 친자확인은 따로 안해도 되겠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B형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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