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보고싶다.
아니다 딱히 누군가 보고싶지는 않다.
누군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다. 그냥 지금 이대로 혼자인 것이 좋다.
무언가 부족하고 아쉬운 듯도 하지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대로가 못 견딜만큼 나쁘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누가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사람이 누군가 이기를 원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이 간절한 것 같기도 하다.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내가 무엇을 원하건 그것은 내 밖의 무언가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는 내가 알고 있지 못하는 나의 숨겨진 어떤 결핍이 그 누구를 보고싶다 느끼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라는 인간은, 스스로의 생각이 무엇인지 조차도 모르고 살아가는 그런 류의 인간 인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는,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이 맞다고 확신을 갖고 살아가는 인간이 얼마나 될까? 있기나 할까?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왜 모르냐고? 나도 그런 것 쯤은 안다. 그런데 그것이 진짜 '나의 그것' 인지 확신하지 못 할 뿐이다. 무슨 소리냐고? 그러니까,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이 이것 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다시 돌아보면 그 때 내 생각이란 것이 사실은 그렇게 생각해야 할 것 같아서 또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여러모로 편할 것 같아서, 로 변하는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그런 경우, 과연 그 생각이 정말 자신의 것이었다고 말 할 수 있을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첨삭이 이루어지고 세상의 잣대에 한껏 휘어지고 난 후에, 일종의 그런 왜곡의 과정을 거친 후에 머리속에 어렴풋이 떠오른 그 무엇을 진정한 나의 생각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또는 지금 내가 생각하고 원하는 것이 그런 왜곡의 과정을 피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왜곡의 과정은 인식 이전의 단계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무의식 이라 칭할 수도 있겠다. 아무튼 의식으로 상이 맺혔다는 것은 그런 왜곡이 발생할 수 있는 단계의 다음으로 진입 했음을 의미한다. 그 상은 왜곡의 과정을 거쳤을 수도 피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 내가 지금 느끼는 나의 생각이란 것이 인식의 이전 단계에서 왜곡의 과정을 거쳐 변형된 것인지 아니면 운 좋게도 그것을 피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는 셈이다. 적어도 신이 아닌 우리 인간의 의식으로는 말이다.
내가 순수하게 간절히 원하는 것과 그럴듯 해보이기 위해서 원하는 것이 서로를 침범하고 끌어 안고 뒤집혀 어떤 방법으로도 경계를 그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것인가 하면 저것이 되고 저것인가 하면 다시 이것 되어 버린다. 구분할 수 없이 뒤엉켜 버린 마음은 그래서 알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외부의 어떤 것에도 왜곡되지 않은 순수한 내 마음 그 자체 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런 애매함이 주는 불편함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 정말 괴로운 것은 진정한 내 마음이 무엇인지,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 이것이 내 마음인 것 같고 저것이 내가 원하는 것 같다라는 아니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내 모습을 스스로 위장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원하는 것 같아서 원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정말이야 라는 의심을 한켠에서 힘겹게 억누르며 살아가는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의심은 억압되는 만큼 농밀해 질 것이고 언제가 임계점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을 지나 결국엔 어떤 형태로든 터져 버릴 것이다. 찢겨져 버린 풍선처럼 초라한 모습만 남겨진 스스로를 나는 감당할 수 있을까?
아니다 딱히 누군가 보고싶지는 않다.
누군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다. 그냥 지금 이대로 혼자인 것이 좋다.
무언가 부족하고 아쉬운 듯도 하지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대로가 못 견딜만큼 나쁘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누가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사람이 누군가 이기를 원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이 간절한 것 같기도 하다.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내가 무엇을 원하건 그것은 내 밖의 무언가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는 내가 알고 있지 못하는 나의 숨겨진 어떤 결핍이 그 누구를 보고싶다 느끼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라는 인간은, 스스로의 생각이 무엇인지 조차도 모르고 살아가는 그런 류의 인간 인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는,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이 맞다고 확신을 갖고 살아가는 인간이 얼마나 될까? 있기나 할까?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왜 모르냐고? 나도 그런 것 쯤은 안다. 그런데 그것이 진짜 '나의 그것' 인지 확신하지 못 할 뿐이다. 무슨 소리냐고? 그러니까,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이 이것 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다시 돌아보면 그 때 내 생각이란 것이 사실은 그렇게 생각해야 할 것 같아서 또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여러모로 편할 것 같아서, 로 변하는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그런 경우, 과연 그 생각이 정말 자신의 것이었다고 말 할 수 있을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첨삭이 이루어지고 세상의 잣대에 한껏 휘어지고 난 후에, 일종의 그런 왜곡의 과정을 거친 후에 머리속에 어렴풋이 떠오른 그 무엇을 진정한 나의 생각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또는 지금 내가 생각하고 원하는 것이 그런 왜곡의 과정을 피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왜곡의 과정은 인식 이전의 단계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무의식 이라 칭할 수도 있겠다. 아무튼 의식으로 상이 맺혔다는 것은 그런 왜곡이 발생할 수 있는 단계의 다음으로 진입 했음을 의미한다. 그 상은 왜곡의 과정을 거쳤을 수도 피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 내가 지금 느끼는 나의 생각이란 것이 인식의 이전 단계에서 왜곡의 과정을 거쳐 변형된 것인지 아니면 운 좋게도 그것을 피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는 셈이다. 적어도 신이 아닌 우리 인간의 의식으로는 말이다.
내가 순수하게 간절히 원하는 것과 그럴듯 해보이기 위해서 원하는 것이 서로를 침범하고 끌어 안고 뒤집혀 어떤 방법으로도 경계를 그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것인가 하면 저것이 되고 저것인가 하면 다시 이것 되어 버린다. 구분할 수 없이 뒤엉켜 버린 마음은 그래서 알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외부의 어떤 것에도 왜곡되지 않은 순수한 내 마음 그 자체 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런 애매함이 주는 불편함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 정말 괴로운 것은 진정한 내 마음이 무엇인지,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 이것이 내 마음인 것 같고 저것이 내가 원하는 것 같다라는 아니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내 모습을 스스로 위장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원하는 것 같아서 원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정말이야 라는 의심을 한켠에서 힘겹게 억누르며 살아가는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의심은 억압되는 만큼 농밀해 질 것이고 언제가 임계점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을 지나 결국엔 어떤 형태로든 터져 버릴 것이다. 찢겨져 버린 풍선처럼 초라한 모습만 남겨진 스스로를 나는 감당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