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선 시간은 오후 3시가 다 되어서다.
점심때가 지났다며 밥 한술 뜨고 가라는 소리를 뒤통수로 튕겨버리듯 그렇게 집을 나섰다.
아침 한때 내렸던 비 때문인지 매일 보던 풍경이 매일 보던 풍경 같지 않았다.
한동안의 더위가 남겨놓았던 희뿌연 수증기 같은 것들이 깔끔하게 치워져 어디까지든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투명한 날이다.
아직 남아 있는, 조금은 음흉스럽게 보이는 비구름에 햇빛 마저 가려져 눈부심도 없다.
원근감이 사라진 2차원의 극단적 선명함만 남은 풍경이다.
꽤 쌀쌀한 한기를 머금고 있는 공기가
코끝에서 시작하여 폐에 이르는 길목의 모든 세포에
깨끗하고 신선한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새로운 에너지는 점막을 뚫고 세포막 사이를 건너 몸 전체로 퍼져간다.
절기에 맞지 않는 더위로 인해 찜통속 생크림처럼 흐물흐물 녹아 흐르던 몸이
다시 응고되고 단단해진다.
심장의 박동에는 힘이 느껴진다.
이런 날씨가 좋다.
햇살의 눈부심과 따뜻한 온기가 피부의 숨구멍 하나 하나로 스며드는 날이 편안한 친구같다면,
티끌의 테두리까지도 또렷해지는 극단적 선명함과,
내 몸을 단단하게 하기에 적당히 차가운 한기,
그리고 엷은 어둠이 주는 적당한 신비감이 최적의 조화로 어우러진,
오늘 같은 날은 두려움과 경외심을 느끼게 하는 역사속 비극적 영웅을 마주하는 느낌이다.
또는 세상이 처음 만들어졌던 태초의 신비한 모습이 그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떠오른다.
조금 전, 세상은 다시 만들어졌고 그 어떤 불순물도 아직 생성되지 않았으며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더더욱 없는 그런 태초의 세상에 어쩌다 내가 오게 된 것이다.
태초의 세상, 그 경외스러운 신비함과 '코엑스'라는 인공물 사이에는
어떤 연결고리도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그리 어색하지도 않았다.
태초의 세상에는 코엑스가 있었고, 반디엔루니스도 있었던 것이다.
상상과 감성이란 것은 이상한 것이다.
아무런 의식없이 신경조직과 근육의 자율적 작용에 이끌려 간 곳에는 소설 '상실의 시대'가 놓여있다.
책을 집어들고, 책을 펴고, 시선을 고정한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내가 존재하는 세계는 태초의 순간에서 '상실의 시대'로 이동한다.
내가 이동하고 변한 것이 아니라 세계가 이동 하고 변한 것이다.
아니다.
세계는 변하지 않았다.
내 앞의 켜켜이 쌓여진 책의 배열도, 내가 있는 건물의 구조도 여전히 그모습이다.
그러니 세계가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변한 것은 내 의식 속 세계이다.
내 의식에 반영되어 재생산된 세계가 2011년에서 태초의 순간을 거쳐 상실의 시대로 모습을 바꾼 것이다.
책을 덮는 순간 다시 그 세계는 2011년의 모습으로 돌아 올 것이다.
의식이 재해석하고 다시 구성한 세계는 원래 존재하는 세계와 다르다.
원래 존재하는 세계는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나와는 상관 없이 그냥 가치 중립적으로 존재 하는 '물질'일 뿐이다.
그 세계는 의식에 의해 재해석 됨으로서 비로소 '나'로 부터 '의미'를 부여 받게 된다.
그리고 그런 의미가 더해지고 윤색되어진 세계에 나는 '존재' 한다.
내 의식속 세계가 내가 존재하는 세계인 것이다.
원래 존재하는 세계는 '시간'을 갖고 있지 않다.
1초전, 1시간전, 수억년 전...
그 때도, 지금도, 앞으로도 '그냥 존재' 할 뿐이기 때문이다.
존재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기에,
존재하는 '시점'이 무의미하고, 때문에 '시간'도 없다.
의식만이 '시간'이라는 기본단위로 '시점'을 나누고,
그 '시점'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와 가치를 세계에 덧붙임으로서.
어제와 오늘, 그래고 내일의 세계가 비로소 구분된다.
그렇게 의식은 세계와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을 대상으로,
인지하고, 재해석하고, 나름대로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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