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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짜 생각

도화지

by 구경거리 2011. 8. 30.

어렸을 때 제법 그림을 잘 그렸다.
이제 막 입학한 중학교 첫 미술시간,
자신의 꿈을 수채화로 그려보란다.
난 작업실 안에서 혼자 붓질을 하는 화가를 그렸다.

두번째 미술시간,
반정도 완성된 내 그림은 다른 반친구들의 그림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수채화는 맑고 투명한 느낌의 붓터치가 살아있어야 수채화 특유의 투명하고 깨끗한 느낌이 난다.
그걸 알리 없는 중1 친구들의 포스터같은 그림들과 내그림은 누가 봐도 확연히 달랐다.
선생님은 내 그림을 보고 진짜 너가 그린게 맞냐는 확인 질문까지 했다.
그리고는 비록 완성된 그림은 아니지만 다른 친구들에게 수채화를 설명하기위한 도구로 수업중에 교실 앞에 전시되기도 했다.
다음주 수업에서는 완성작을 보여야한다.
수채화가 무엇인지 그 끝을 보여주마... 라고 다짐하면서 한주동안 그림을 완성해 갔다.

그런데 너무 잘하려는 욕심이 앞서서였을까.
너무 많은 붓질에 투명한 터치감은 사라져 버렸고,
그걸 다시 되살리려는 미련한 덧칠에 도화지는 버티질 못하고 결국 일어나 버렸다.
심한데는 구멍이 날 정도였다.

세번째 미술시간.
내 그림은 과도한 덧칠이 수채화를 어떻게 망치는지를 가르치기 위한 교재가 되었고
친구중 한명 입에서는 '지난시간에 본건 누가 그려 준거고 마지막에 너가 그려서 망친거지?' 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물론 난 아무 설명도 하지 못했고 그냥 치미는 억울함에 나오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아냈었다.

내가 잘못한게 도대체 뭐야.
잘못이라면 잘 하려고 애쓴 것 밖에 없는것 같은데,
내가 왜 이런 경우를 당해야 해... 하는 생각에 억울하고 야속하기만 했었다.

그림을 완성해 나가던 마지막주 어느 즈음에,
욕심스러운 덧칠로 그림을 망쳤다는 걸 처음 느꼈던 순간에,
뜯어내고 처음부터 다시 그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던 그 순간에,
그러나 이미 중간단계를 본 사람이 너무 많아 그럴수도 없다는 사실에,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막막함에 꽤 절망스러웠다.

세상에는 아무리 간절하게 원해도 이미 어쩔수 없는 것이 있다...

도화지는 꽤 자주 한사람의 삶에 비유되곤 한다.
지금 내 도화지는 어떨까.
생각하면 머리 아픈것 밖에는 없을 것같아 의도적으로 피해왔던 것들이,
바램과는 달리 사라지지 앓고 고스란히 남아 내안에서 썩고있는 기분이다.
너덜해진 도화지처럼...

가끔은 뜯어내고 새 도화지 위에 다시 그리고 싶다.
지금까지의 경험, 사람, 기억, 시간 모두 다 리셋하고,
깨끗한 도화지에 처음 부터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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